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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1415년 11월 26일 출생하여 1487년 11월 28일에 사망한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랍니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이라고 하며, 시호는 충성(忠成)이랍니다.

그는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랍니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답니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랍니다. 한성부가 고향 출생지랍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습니다.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답니다.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이 되었으며,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답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답니다.

 

아울러 지난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답니다. 하지만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니다.

한편 그는 연산군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졌으며, 이후에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한명회의 사후는 비참했습니다. 이후 중종 때에 신원된답니다.